티스토리 뷰

심리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

아트컬쳐로드 2020. 7. 3. 15:07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실용주의의 설명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그 용어는 제임스(William James)가 1898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를 방문하여 행한 ‘철학적 개념과 실천적 결과’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강연에서 제임스는 ‘퍼스의 원리, 즉 실용주의의 원리’라고 불렸던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대상에 대한 사고의 완벽한 명확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 우리가 어떤 감각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어떤 반작용을 대비해야 하는지 등 그것과 연관하여 인지 가능한 실천적 효과만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효과에 대한 관념이야말로, 그것이 적극적 의의를 갖는 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갖는 관념의 전부이다.” 나아가서 제임스는 이 원리가 ‘좀 더 포괄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하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어떤 진리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 테스트는 실로 그것이 지시하거나 고취시키는 행위이다.

 

어떠한 철학적 명제라도 그 효과적 의미는,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언제나 미래의 실천적 경험 속의 구체적 결과가 되게 할 수 있다. 이때 초점은 경험이 능동적이라는 점보다는 구체적이라는 데 놓여 있다.”이때 제임스가 했던 일은 과학적 탐구의 한 원리를 사고 일반에 해당되게 확대시킨 것이다.

 

과학적 탐구의 원리란 ‘퍼스의 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관념을 의미 있게, 혹은 퍼스의 말마따나 ‘명석하게’ 하고자 한다면, 그 관념을 그 대상이 모든 가능한 조건 하에서 나타낼 실세계의 행태에 관한 것으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퍼스가 든 예 가운데 하나를 이용해 말하자면, 어떤 것을 ‘단단하다’고 부를 때 우리는 그것이 유리를 긁을 수 있고, 구부러지지 않을 것이고 등을 의미하며, 그러한 실천적 효과야 말로 ‘단단함’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전부이다.

 

‘단단함’은 추상적 속성이나 본질이 아니라, 단단한 모든 것들이 행하는 바의 총합일 따름이다.
제임스의 아이디어는 과학적 개념에 대한 이 이해 방식을 우리의 모든 신념으로 확대시킨 것이었다. 신념을 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물었다.

그것은 그 신념의 합리적 자족성, 즉 그 신념이 논리적 정밀 검사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것은 그 신념을 견지해서 우리가 세계와 더 유용한 관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철학 체계를 선택할 경우 초래될 실천적 결과 무엇인가를 묻는 일인데, 철학자들은 오히려 일반적인 제일 원리로부터 진리를 도출해 내려고, 그리고 다양한 철학 체계의 교의들을 합리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하려고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허송하였다고 제임스는 생각하였다.

 

“실천적 경험에 있어 그 신념의 현금가치(cash-value)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신념이 참이나 거짓임에 따라 이 세계에 무슨 특별한 차이가 벌어질 것인가?”, 어떤 관념에 대해서든 철학자는 그렇게 물어야 한다고 제임스는 생각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9년 후에『실용주의』에서 사용한 유명한 구절처럼, “진리란 신념으로서 좋은 것, 그리고 확정적이며 지정 가능한 이유에서 좋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들에 대한 이름이다.”


‘실천적’이나 ‘현금가치’와 같은 용어들은 제임스를 유물론과과학의 옹호자로 보이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에 실용주의를 도입하는 제임스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유물론적이며 과학적이라고 그가 간주했던 당시의 시대에, 신에 대한 믿음의 창문을 열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과연 증명될 수 있을지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단지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차이를 초래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 필요할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만일에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절대적 증명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기준, 즉 프래그머틱 한(실용주의적) 기준을 과연 믿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모든 선택을 행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제임스는 생각하였다. 우리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 증명을 결코 바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결정은 오늘의 우주가 어떠하며, 내일은 그것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내기이다.

 

연심파와 경심파
연심파
합리론적(원리에 의존함)
주지적
관념론적
낙관적
종교적
자유의지론자
일원론적
독단적


경심파
경험론자(사실에 의존함)
감각적
유물론적
비관적
비종교적
숙명론적
다원론적
회의적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역사상으로 볼 때, ‘주지론’, ‘감각론’이란 말이 각각 ‘합리론’, ‘경험론’이란 말과 같은 뜻의 말로 쓰여 왔습니다. 한데 주지주의는 자연이 이상주의적이고 낙관적인 경향과 결합되기가 일쑤인 것과 같고 다른 한편으로 경험론자들이란 보통 유물론적으로 되기 쉬운 것 같습니다.

 

경험론자도 낙관적일 수는 있으나 역시 일시적이고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합리론은 언제나 일원론적입니다. 전체나 보편에서부터 출발하여 사물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경험론은 부분에서부터 출발하여 전체란 부분의 뭉침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다원론적이라고들 하는 걸 싫어하지 않습니다. 합리론은 그 자체가 경험론보다 더 종교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관해선 토론의 여지가 많이 있으므로 저는 그런 주장이 있다는 점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이 사실과 일치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고 하면 합리론자가 소위 감상적인 인물인 경우와 또 경험론자가 자기 머리는 냉철하다고 스스로 뽐내는 경우올시다. 지금 말씀드린 합리론자나 경험론자는 흔히 쓰는 말로 말씀드리자면 한쪽은 자유의 지론자요 다른 한쪽은 숙명론자이기 일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합리론 자는 독단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기질의 사람일 것이고 한 편 그런 경험론자는 회의적인 기질이어서 토론의 여지를 남겨놓곤 하는 사람일 겁니다.

 

아마 여러분께선 쉴러, 듀이 양 씨의 진리론이 멸시와 조롱의 벼락을 맞았다는 사실을 아시면 놀랄 겁니다. 모든 합리론자들이 반대하고 나섰지요. 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은 특히 쉴러 야 말로 매깨나 맞아야 하는 못된 학생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말은 할 말이 못됩니다만은 그 사실이 제가 실용주의의 기질과 반대된다고 말씀드린 합리론의 기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간접적이긴 하지만 너무나 잘 말해주기에 말씀드립니다. 실용주의는 사실과 유리되어 가지곤 만족할 수 없는데 반해 합리론은 추상적 것으로 만족합니다.

 

실용주의에선 복수의 진리를 말하고 진리에서 얻을 수 있는 공리성, 만족감을 말하고 성공적인 기능 등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전형적인 주지주의의 입장에서 보기엔 거칠 고제 2류급의 임시변통적 진리관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건 진리가 아니라는 거죠. 그런 건 모두가 주관적 평가기준이라는 겁니다. 이와는 달리 객관적 진리란 비 공리적이고 고답적이고 세련돼 있고 심오하고 위엄이 있으며 고귀한 진리는 것이며 또 우리 생각은 절대적인 실재와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며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진리라는 겁니다. 우리의 조건부의 생각 같은 건 그 진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고 심리학적 문제에 지나지 않은즉 진리 문제에 관한 한, 심리학은 물러서고 논리학만이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유형의 마음이 얼마나 날카롭게 대립되는가를 보십시오. 실용주의에선 사실과 구체적인 것에 집착하고 진리가 특정한 경우에 어떻게 작용하나를 보고 그것을 일반화시킵니다. 실용주의에선 진리란 우리 경험 속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모든 종류의 가치에 대한 총칭
이라 봅니다.

 

합리론에선 진리란 순수한 추상이요 명목으로 우리는 거기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실용주의에선 왜 우리는 거기 복종해야 하느냐 하는 걸 자세히 밝히려 드는데 합리론에서는 그 추상의 근거가 되는 구체적인 것을 알지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합리론에선 우리가 진리를 부정한다고 합니다마는 우리로선 왜 진리를 따르며 또 따라야 하느냐 하는 이유를 찾고 있는 겁니다. 전형적이고 극단적인 추 상론자들은 구체적인 것에 부딪치면 벌벌 떠는 판이니 이왕이면 창백한 유령 같은 걸 골라잡자는 투입니다. 그러니 만일 두 개의 우주가 있다면 그들은 풍부한 현실을 담은 우주보다도 뼈대만 있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그런 우주는 순수하고 명료하고 고상한 것이니까요. 실용주의와 합리론의 차이가 심히 중요하다는 건 이젠 완전히 알게 됐습니다. 본질적인 차이점은 합리론에서는 실재란 영원한 옛날부터 완성되어 있다고 보는 데 대해 실용주의에선 실재는 아직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며 나머지도 장래에 기대하고 있다고 보는 점입니다. 한쪽에선 우주는 절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보는데 대해 또 한쪽에선 모험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실용주의냐 합리론이냐 하는 문제도 이쯤 되면 지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주의 구조에 관한 문제입니다. 실용주의를 취한 경우 이 우주는 판에 박은 듯 하나뿐인데 그 우주는 미완성이요, 또 어디서나 특히 생각하는 존재가 활동하고 있는 곳
에선 점차 성장해가고 있는 우줍니다. 합리론을 취하게 되면 우주는 여러 가지가 있는 가운데 그중 하나만이 진정한 우줍니다. 무한하고 호화롭고 영원히 완성된 우주가 그것이고 기타 그릇된 우주는 유한하고 잘못 해석되고 토막이 난 우주들입니다.

 

실용주의의 진리론

 

실용주의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창안한 인물은 퍼스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것을 하나의 철학 사조로 유명하게 한 인물은 제임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임스는 수많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실용주의를 의미 이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관으로 천명하여 퍼스의 견해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견지를 표명하였다. 이로 인해 제임스와 퍼스는 논쟁을 벌였고 퍼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실용주의를 아예 다른 이름, 즉 프래그머티시즘(pramaticism)으로 고쳐 부르기까지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단순히 인식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관, 나아가서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는 실용주의의 방법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 즉 사태나 문제들의 실제적인 의미에 관한 연구로 본다.‘만일 저 개념보다 이 개념이 참이라면,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 실제로 무슨 효과를 낳겠는가?’를 그는 따진다. 참된 것은 마땅히 실천이나 경험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임스는 ‘현금가치(cash-value)’라고 한다. 구체적인 결과를 갖는 것만이 의미를 지닌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진리들은 구체적인 사실들에 영향을 주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예컨대 ‘신’, ‘물질’, ‘절대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용어나 개념도 현금가치(cash-value)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각각의 책 속에서 이러한 용어들의 현금가치를 뽑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 용어를 당신의 경험의 흐름 속에서 작동하게 하라!”라고 제임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는 추상적 보편자보다는 개별자를 더 강조하는 명목론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합리주의적 전통에 반대하는 견지를 택하게 된다. 제임스는 실용주의를 하나의 진리관으로 정립하기 위해 진리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란 실재와 관념의 일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따질 때에는 반드시 결과적인 특성, 즉 실제적 의의를 따져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기보다는 다양한 여러 유형으로 구성된 복수의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일 수도 있다. 제임스에 의하면, 진리의 기준은 어떤 이론이나 명제의 작동 가능성(workability)에 기초한 것이다.

 

한 관념은 구체적인 경험적 사실들에 적용되어 제대로 작동할 때 참된 관념이며, 작동하지 못하면 참된 관념일 수 없다. 참된 관념은 실제적 가치를 가지지만 그릇된 관념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실용주의의 테스트는 무엇이 가장 잘 작동하는가와, 무엇이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잘 들어맞는가의 여부이다. 그는 이와 같은 실용주의의 테스트를 심지어 신학에도 적용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정도에 따라 신학의 진리성 여부도 판단되어야 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활력과 용기, 행복이나 종교적 위안을 증진시켜 주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임스가 과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신학의 개념에도 동시에 적용 가능한 진리 개념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제임스는 진리의 의미를 만족스러운 경험을 주는 신념과 연관시켜 파악한다. 하나의 신념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그 신념에 입각하여 행위할 때 경험상의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신념을 견지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행위를 한 결과가 만족스럽다면 그 신념은 진리라는 뜻이다. 이 아이디어는 퍼스가 주장한 실용주의의 준칙, 즉 한 개념의 의미를 명석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후 결과를 보고서 판단해야 한다는 준칙을 진리의 개념이나 의미에 곧바로 적용시킨 결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리 개념은 ‘만족(satisfaction)’ 또는 ‘만족스러운 결과’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성격의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만족’이나 ‘만족스러운 결과’를가령 순전히 심리적인 것 혹은 생물학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논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객관적 혹은 [상호] 주관적으로 검증되지 않거나 검증될 수 없는 어떤 신념을 견지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만족의 수준에 있어서도 일시적인 만족과 장기적인 것 간에는 많은 차이가 날 것이다. 제임스는 종교적 신념에 관해 논의할 때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마음의 평온함이나 종교적 위안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진리의 의미와 부합되는 것에 당연히 포함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함에 있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산출케 해주는 신념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진리의 기준을 심리적 생물학적 만족에 두게 된다면, 제임스의 진리관은 매우 혼란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이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족과 불만족을 따짐에 있어서 심리적 혹은 생물학적인 기준을 유일한 것 혹은 주된 것으로 채택한다면, 그 기준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심한 경우에는 한 개념이 초래하는 결과가 만족스러운지를 판가름하는 주관의 심리상태나 그 주관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 등에 좌우되어서 판단의 일관성을 견지하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임스를 비판하는 많은 철학자들은 제임스의 진리관이 바로 그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해석하여 그것을 비판하였고, 퍼스도 그러한 관점에서 제임스의 실용주의를 주관주의적이며 과학적 방법과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제임스가 스스로의 진리관을 설명하는 과정이나 내용에는 비판자들이 문제점으로 제기한 요인이 분명히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제임스가 주장하는 진리의 의미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더 포괄적인 의미는 다음에서 보듯이 진리를 경험의 총체적인 과정과 연관시킨 그의 주장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개념을 경험의 총체적 과정에 연관시켜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진리가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우리 경험의 일부에 해당되는) 아이디어들이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들과 만족스러운 관계에 이르게 끔 도움을 줄 때 진리이다.”이에 따르면, ‘만족’의 개념은 어떤 신념을 다른 신념이나 신념 체계로부터 떼어내서 그 자체로 분리, 고립시킨 다음에 그 신념이 초래하거나 산출할 심리적 혹은 생물학적 결과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경험이나 신념 체계의 총체적인 고려하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제임스의 이러한 견해에는 전체론적인 관점과 정합설의 관점을 함께 도입하여 신념의 진리성을 판가름하자는 발상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비록 어떤 신념이 그 하나만으로는 ‘현금가치(cash-value)’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경험의 다른 부분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이루지 못한다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만족을 주지 못하므로 진리의 의미에 적합치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떤 광신도가 믿고 있는 신념은 그 자체로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 그 신도에 심리적 위안을 포함한 상당한 만족감을 산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과학적 신념 체계를 비롯한 다른 신
념 체계들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진리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제임스가 주장하는 진리의 의미에서 ‘만족’은 단순히 심리적 혹은 생물학적인 효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의 경험이나 신념 체계 전반이 고려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제임스가 어떻게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신념들을 포섭할 수 있는 진리 개념을 모색하려 하였는지 그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체론이나 정합설의 관점 등이 반영되었다고 하지만, 제임스의 진리관은 절대주의적 진리 개념을 부정하며 상대주의를 분명히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진리는 무시간적이며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리는 총체적인 경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며 그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 관념의 진리성은 그 관념 속에 내재된 붙박이의 속성이 아니다. 그 관념이 진리로 나타난 것이다. 그 관념이 참이 되는 것이요, 그 관념이 사건들에 의해 참인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It ismade true by events.) 그 관념의 진리성은 실제로 하나의 사건, 혹은 하나의 과정 즉 그 자신을 검증하는 검증화(verification)의 과정이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시간에 따라 그리고 검증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이게 된다. 마치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기나 수준에 따라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 것들이 하나둘씩 과학적 지식으로 여겨지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그러한 것을 제임스는 진리의 의미로 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파악된 진리의 의미나 개념은 당연히 다원성과 가변성을 내포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진리관은 상대주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임스가 이와 같은 실용주의 진리관을 발전시켜 간 배경에는 그의 근본적 경험론과 다원적 우주론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는 근본적 경험론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계에는 모든 것을 구성하는 오직 하나의 근본 질료, 즉 소재가 있다.

 

우리는 그 자료를‘순수 경험’이라 부른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들의 세계는 모자이크나 모자이크들의 집합이며 이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을 형성한다. 또한 이 세계는 불가피하게 고정된 길을 밟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완성의 여러 가지 사물들로 되어 있어늘 새롭고 신기한 것이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질서가 세워진 우주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 우주’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개방적 우주관과 근본적 경험론의 입장에서 그는 상대주의적인 관점을 견지하여 실용주의를 하나의 진기관 내지는 세계관으로서 정립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Menand, Louis, Pragmatism : A Reader [김동식 외 옮김] [서울 :철학과 현실사], pp.14-16)

참고:박경화 역,『프래그머티즘/김동식,『프래그머티즘』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기에 맞은 세대  (0) 2020.07.03
광고 심리학  (0) 2020.07.03
심리학의 원리  (0) 2020.07.03
페르소나 방법론  (0) 2020.07.03
문화기술지 -에스노그래피  (0) 2020.07.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