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원리
『프래그머티즘』
제임스는 인간의 기질은 그 어떤 다른 요소보다도 철학 경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정한 근거에 기반하여 철학적 사유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기질이 어떻게 해서든 그 철학자의 주장에 유리한 증거를 제공해 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기질이 딱딱한 사람들은 추상적 원리보다는 구체적 사실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기질이 감상적인 사람들은 구체적 사실을 넘어선 추상적 원리를 추구하게 된다. 제임스는 이처럼 딱딱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경심파라고 부르고, 반대로 무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을 연심 파라고 명명한다. 전자는 대체로 사실을 중시하는 경험론자로서 감각을 중시하며 실재론적이고 비관적이며, 비종교적, 숙명론적, 다원론적, 회의론적 경향을 띤다. 반대로 연심파의 사람들은 원리를 중시하는 합리론자(이성주의자)로서 주지적이고 관념론적이며, 낙관적, 종교적, 자유의지적, 일원론적, 독단론적 경향을 띤다.
심정적으로 제임스의 실용주의는 경심파와 연심파 중에서 경심파 측에 경도되는 듯하다. 연심파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추상적 원리 또는 절대적 실재란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것을 ‘겨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특정한 사실에 붙인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점에서 실용주의자는 유명론을 수용한다. 또, 우리에게 경험되는 현상적 사실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실용주의자는 경심파의 주장을 수용한다. 합리론은 순수
하기는 하나 비현실적인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일반적인 경심파 철학, 가령 실증주의적 경홈런과 달리 추상적인 것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경심파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실용 주의는 가령 추상적인 것들이 특수한 것들을 잘 처리하고 어떤 목적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추상을 반대하지 않는다. 만약 종교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가져다준다면, 그 역시 배제할 필요가 없다. 실용주의는 비록 전형적인 경심파 철학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생활에 가치 있는 것이라면 모두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용주의의 입장은 경심파와 연심파 모두에게 불만 족스러울지 모르나 철학에 대한 일반인의 태도를 고려한다면 매우 획기적인 입장이 될 수 있다. 경심파가 사실을 중시하는 태도를 지녔다면 연심 파는 원리와 가치를 중시한다. 하지만 일반인은 이러한 두 측면을 모두 중시하는 철학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실용주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적 견해일 수 있다는 것이 실용주 의자 제임스의 생각이다. 종래의 철학자들이 이론을 수수께끼를 풀어서 우리로 하여금
제임스『실용주의』
안식할 수 있게끔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제임스는 이론을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물이 든 컵으로 촛불을 비추면 빛은 전적으로 그 컵 안에 있는 것만 비추는데, 이 경우 실제로는 물밖에 공기가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컵 안의 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이론을 통해 공기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다만 이론을 이용하여 그러한 공기를 상정한 결과를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임스에 따르면 실용주의의 방법이란 공기, 즉 최초의 것, 원리, 범주, 어떤 필연성 같은 것에서 눈을 돌려 물, 즉 마지막 것, 결실, 결과 사실을 중시하는 하나의 철학적 태도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자신의 철학에만 유일한 것은 아니며, 많은 철학자들이 이미 적절히 이용한 바 있고, 다만 그들의 이용방식이 부분적이었다면 자신의 방법은 그전체를 포괄 하 여모 든 이론에게 융통성과 동력을 준다는 점에서 더욱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제임스는 이러한 실용 주의적 태도를 진리관과 연결 짓는다. 그에 의하면 진리란 실재와 관념의 일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따질 때에는 반드시 결과적인 특성, 즉 실제적 의의를 따져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란 절대적인 것이기보다는 다양한 여러 유형으로 구성된 복수의 것일 수도 있고, 상대적일 수도 있다. 제임스에 의하면, 진리의 기준은 어떤 이론이나 명제의 작동 가능성(workability)에 기초한 것이다.
한 관념은 구체적인 경험적 사실들에 적용되어 제대로 작동할 때 참된 관념이며, 작동하지 못하면 참된 관념일 수 없다. 참된 관념은 실제적 가치를 가지지만 그릇된 관념은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진리에 관한 실용주의의 테스트는 무엇이 가장 잘 작동하는가와 무엇이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에 잘 들어맞는가의 여부이다. 그는 이와 같은 실용주의의 테스트를 심지어 신학에도 적용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정도에 따라 신학의 진리성 여부도 판단되어야 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활력과 용기, 행복이나 종교적 위안을 증진시켜주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임스가 과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신학의 개념에도 동시에 적용 가능한 진리 개념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체론이나 정합설의 관점 등이 반영되었다고 하지만, 제임스의 진리관은 절대주의적 진리 개념을 부정하며 상대주의를 분명히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진리는 무시간적이며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리는 총체적인 경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나며 그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 관념의 진리성은 그 관념 속에 내재된 붙박이의 속성이 아니다. 그 관념이 진리로 나타난 것이다.
그 관념이 참이되는 것이요, 그 관념이 사건들에 의해 참인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It is made true by events.) 그 관념의 진리성은 실제로 하나의 사건, 혹은 하나의 과정 즉 그 자신을 검증하는 검증화(verification)의 과정이다.” 따라서 진리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시간에 따라 그리고 검증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이게 된다. 마치 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기나 수준에 따라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 것들이 하나둘씩 과학적 지식으로 여겨지는 과정을 연상시키는 그러한 것을 제임스는 진리의 의미로 천 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파악된 진리의 의미나 개념은 당연히 다원성과 가변성을 내포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진리관 은상 대주의 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래그머티
즘』, 김동식(서울 : 아카넷, 2002) pp.137-142) 제임스는 최초의 것이나 원리가 아니라 마지막 것, 또는 사실에 눈을 돌리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오랫동안 논쟁거리로 남아 있던 철학적 문제들에 적용함으로써 그 이론적 우월성을 입증하고
자 한다.
제임스가 다루는 문제들은 실체, 자연의 디자인, 자유의지, 사실, 형이상학 등과 관련된 것들인데, 대체로 유사한 형태의
논증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실체의 문제만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제임스에 따르면 일반인들은 실체를 속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가령 백묵이 실체라면 그것에 따르는 속성들은 희다, 약하다, 기둥 꼴이다 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임스는 이러한 속성들과 구별되는 실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가령 신이 있어서 속성들은 놓아두고 실체만 없애버린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는 그 어떤 것이 반드시 속성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이름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각기 물질적, 정신적 실체를 가정하고 있는 유물론과 유신론의 대립도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세계는 양자 중에서 어느 가설을 택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고 해도 원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을 따름이고, 원자의 탈을 쓰고 원자가 받을 감사를 받을 수 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역시 실용주의적으로 이러한 판단은, 회고적인 경우에는 철저하게 무의미한 물음이지만 미래를 전망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지금까지 어떠했나를 알고 나면 다음에는 ‘이 세계는 무엇을 약속하는가?’라고 묻는다. 만약 물질이 성공을 약속하고 그 법칙에 따라 이 세계를 더욱더 완성되게끔 해주기만 한다면 이성적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물질을 경배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유물론의 약점이 드러난다.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은 언젠가 사멸해 버릴 작은 별에 잠깐 존재하는 작은 생물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물론은 인간에게 우리의 영원한 도덕적 이상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신의 관념은 기계론적 철학에서 유행하는 수학적 관념처럼 분명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실제적 효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수학적 관념보다 우월하다. 신의 관념은 이상적인 질서를 보장해 주고 또 영구적으로 유지시켜 주니 말이다. 물론 신이 있는 세계라 할지라도 극단적인 경우에 타버릴 수도 있고 얼어붙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신의 이상이 어떤 다른 곳에서 여전 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
리는 신의 관념을 통해 우리의 삶을 무한히 긍정할 수 있고, 그런한에서 실용주의적으로 검토해본 신의 관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는 것이 실체, 또는 신의 관념에 대한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적용의 결론이다.
심리학의 원리 링크
https://ko.wikisource.org/wiki/%EC%8B%AC%EB%A6%AC%ED%95%99%EC%9D%98_%EC%9B%90%EB%A6%AC